2020US오픈 여자 단식 결승전이 우리 시간 내일(9월13일) 아침 5시에 미국 뉴욕에서 열립니다. 나오미 오사카(22)와 빅토리아 아자렌카(31)가 우승 트로피를 다툽니다. 오사카와 세레나 윌리엄스의 결승 재대결(18년 결승전 기억나시죠? 세레나가 엄청 열 받아서 경기 내팽개쳤던)을 기대한 사람들에겐 다소 아쉽지만, 오사카와 아자렌카의 맞대결도 흥미롭습니다.
스포츠는 결과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단순히 누가 이기고 졌느냐만 따지는 건 아니라는 거죠. 과정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스포츠에는 스토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스토리에 빠져 감동도 받고 흥분도 합니다. 선수들은 스토리의 주인공 역할을 충실히 하고 드라마가 끝나면 또 다른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이번 US오픈 여자 단식 결승의 스토리는 뭘까요? 영국 가디언지의 케빈 미첼 기자는 ‘인도주의’라고 말합니다. 대회 내내 경기마다 마스크에 인종폭력으로 피해를 당한 흑인들의 이름을 새겨 쓰고 나온 오사카와 미혼 엄마로서 테니스를 포기하면서까지 아들을 지키려고 노력한 아자렌카의 속 깊은 인간애에 초점을 맞춥니다.
오사카와 아자렌카는 2개 대회 연속 결승에서 맞대결합니다. 2주 전에 열린 웨스턴앤서던오픈 결승에서 두 사람의 대결이 성사됐지만, 오사카가 햄스트링 부상을 이유로 기권하는 바람에 아자렌카가 멋쩍게 우승컵을 들었죠. 하지만 이번 결승에서는 아자렌카에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겁니다. 오사카가 7번째 흑인피해자 이름을 새긴 검정마스크를 준비하며 결승전을 벼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디언지가 이번 결승의 주제가 인도주의라고 한 근거는 대충 이렇습니다.
오사카는 8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웨스턴앤서던오픈 4강전을 보이콧했습니다. 당시 흑인이 백인 경찰에 피해를 입은 사건에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4강 출전을 포기한 겁니다. 그러곤 곧이어 같은 곳에서 열린 US오픈에서 1회전부터 그 동안 인종폭력에 희생당한 흑인피해자 이름을 적은 마스크를 쓰고 코트에 나왔습니다. 대회 내내 화제가 됐고 많은 이들이 오사카의 의도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피해 가족들도 오사카에게 고마움을 표했구요. 오사카는 “나는 테니스 선수 이전에 흑인 여성”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오사카는 “마스크 7개(US오픈 1회전부터 결승까지 치러야 하는 경기 수)로도 모자랄만큼 흑인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이 슬프다. 결승전에서는 모든 흑인희생자의 이름을 보게 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흑인인 세레나 윌리엄스는 “오사카가 좋은 결정을 했다. 나 역시 우리 사회에 불의가 많다고 느낀다”며 오사카를 지지했습니다.
오사카가 결승을 제 컨디션으로 치를지는 미지수입니다. 웨스턴앤서던오픈부터 계속 경기를 해 온 탓에 피로가 누적된 데다가, 햄스트링 부상도 아직 낫지 않았습니다. 오사카는 잠도 많이 부족하답니다. 오사카는 “난 그랜드 슬램 대회 기간에는 잠을 안 잔다. 자려고 노력하지만 눈 뜬 채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다”고 자신의 상태를 전했습니다.
아자렌카의 인도주의는 엄마 본능에서 발견됩니다. 유럽 작은 나라 벨라루시에서 태어난 아자렌카는 15살에 테니스 꿈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로 건너옵니다. 전성기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2011년 윔블던 4강에 오른 뒤 2012년과 2013년 2년 연속 호주오픈 우승과 US오픈 준우승을 차지합니다. 2013년 프랑스오픈에서는 4강에 올랐습니다. 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테니스 혼합복식 금메달과 단식 동메달을 벨라루시에 바칩니다.
2012년 말에 미국인 음악가와 사귀기 시작한 아자렌카는 2014년부터 코트에 모습을 안 보였습니다. 부상과 우울증으로 몸과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또 다른 남자친구를 만나 사귀면서 2016년 12월에 아들을 낳았고 2017년 윔블던 대회 후에 두 사람은 결별했습니다. 두 사람은 헤어진 후에 아들 양육권을 놓고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고, 아자렌카는 2017년 후반기 남은 투어 일정을 중단했습니다. 2018년 초에 다시 코트로 돌아왔지만 아자렌카가 양육권 소송을 진행하려면 자택이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는 재판 결과 때문에 대회를 많이 건너뛰었습니다. 선수로서 여자로서 엄마로서 많은 곡절을 품고 살아온 셈입니다.
아자렌카는 솔직합니다. 그는 “나는 오랫동안 백핸드를 고민하는 대신에 주위의 기대와 싸워야 했다. 나는 지금 정신적으로 다른 곳에 머물러 있다”며 선수로서 힘든 여정을 털어놨습니다.
“7년 전에 호주오픈 우승을 한 후에 사람들은 내가 계속 좋은 성적을 내길 기대했다. 근데 올해는 주위의 기대가 별로 없었다. 아무 것도 없이 세계 1위가 된 사람은 자기가 무적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자아가 자라기 시작한다. 자아에 상처를 입으면 매우 힘들고 아프다.”
아자렌카는 좋은 선수보다는 좋은 인간이 먼저 되길 원한다고 말합니다.
“난 실수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했다. 테니스 선수가 된다는 것 자체가 당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거나 더 안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진 않는다. 당신은 여전히 인간이다. 나는 내가 한 것에 대해 더 책임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수단은 많은 경기에서 패배해 보는 것이다. 난 지금 더 좋은 테니스 선수가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내 자신과 내 아들을 위해 더 좋은 인간이 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쉽게 상처받고 약하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좋은 것이다. 많은 감정을 가지는 것도 좋은 것이다”
아자렌카는 오사카보다 9살이 많습니다. 오사카는 당당하고 아자렌카는 속이 깊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선수를 넘어 좋은 인간이 되는 것, 이번 여자단식 결승의 주제로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13일 아침 5시에 열릴 오사카와 아자렌카의 인간극장이 몹시 기대됩니다. 상대전적은 오사카가 2승1패로 앞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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