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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 장편 소설 '7년의 밤'

살아가는 이야기들

by 법을알자 2013. 9. 9.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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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에 딸을 잃은 사내, 그 사내로부터 아들을 지키려는 또 한 사내"

정유정 작가의 장편소설 '7년의 밤'. 500쪽이 넘는 분량. 워낙 책 읽는 속도가 느린 나로선 큰 도전이었다. 설상가상, 글씨도 작았다. ^^  기우였다. 말 좀 보태서 '단숨에 읽었다'고 할까. 오전에 집어든 책을 저녁 먹기 전에 끝냈다. 책 읽는 중간중간에 할 건 다 하고 말이다. 몇 시간 안 돼 500쪽이 넘는 책을 읽는다는 건 두 가지로 설명 가능하다. 재미없어서 슬렁슬렁 넘겼거나, 재밌어서 술술 넘겼거나. 후자다. 재미있었다. 소설책이 재미있으면 되지 뭘 또 바라나.

과문한 탓에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는 액자식 구성이다.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 하지만 그 두 이야기는 시간으로 연결돼 있다.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풀어낸다. 

이야기는 살인마로 불리는 아빠를 둔 아들을 먼저 내세운다. 아들은 살인마 아버지 탓에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다. 친척집을 전전하는 동안 스스로를 세상과 단절시키며 포박했다. 어둡고 우울한 삶의 구세주는 7년전 아버지를 살인마로 만든 사건이 일어난 세령호에서 함께 지냈던 이웃집 아저씨. 소설가를 꿈꾸던 아저씨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끔찍한 세령호 사건이 일어났던 7년 전 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령호는 세령마을을 수몰시켜 인공호수다. 호숫물은 상수도로 쓰이고, 전기도 만든다. 세령호 근처 수목원엔 부부와 딸이 있다. 의사 남편은 폭력적이다. 자기 맘에 안 들면 아내와 딸에게 가차없이 손찌검을 해댄다. 아내와 딸은 몸이 성할 날이 없다. 그 날 밤은 아내와 이혼 소송에서 졌다. 안 좋은 기분에 딸이 불을 질렀다. 엄마 흉내내며 화장품 바르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했건만, 딸은 집 나간 엄마의 블라우스를 걸쳐입고 입술에 얼굴에 온통 화장 범벅을 해놓곤 잠들어 있었다. 아빠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다. 침대에서 곤히 자던 딸을 깨웠고,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딸은 옆에 타고 있던 양초를 아빠 얼굴에 뿌리고 집을 뛰쳐나갔다. 얼굴을 수습하고 딸을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아들의 아빠는 처음부터 살인마가 아니었다. 별 볼 일 없는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뒤로 하고, 인공호수 경비 일을 하고 있다. 아내는 너무 생활력이 강하다. 항상 구박이다. 사는 게 재미있을리 없다. 자주 술에 빠져 살았다. 유일한 삶의 희망은 아들이다. 아내를 바라보던 멍한 눈도 아들만 보면 발광한다. 아내가 감당하기 힘든 융자를 끼고 아파트를 사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 심심산골 세령호 경비팀장 근무를 자원했다. 이사가기 전에 세령호 사택에 미리 가보라는 아내 말에 운전대를 잡았다. 마침 그날은 후배가 고기집을 여는 날. 후배 집에 들러 소주 두 병을 까고 세령호롤 향했다. 초행에 밤길에 음주까지. 세령마을에 도착했지만 길을 잘 못 들었다. 쿵 소리가 났다. 뭔가가 차에 부딪혔다. 소녀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놀란 나머지 간신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던 소녀의 입에 큰 손을 갖다 댔다. 죽은 소녀는 세령호에 버렸다.   

그날 밤, 새로 올 팀장을 기다리던 삼촌은 세령호 속이 궁금했다. 수몰된 마을을 직접 보고 싶었다. 삼촌은 스쿠버다이빙을 잘했다. 팀장이 약속한 시간에 오지 않자, 삼촌은 다이빙 장비를 챙기고 세령호로 향했다. 수몰된 마을을 훌훑어본 삼촌이 물 위로 올라갈 무렵 인형같은 게 보였다. 소녀였다. 삼촌은 갈등했다. 괜히 엄청난 일에 말려들어 인생 복잡하게 꼬이고 싶지 않았다.

진짜 이야기는 이제 시작된다. 줄거리는 여기서 접는다. 책을 읽으면서 인물의 행적과 사건의 아귀가 척척 들어맞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정유정이라는 작가가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소설이 재밌으려면 이탄탄한 줄거리만으론 안 된다. 인물의 성격과 행동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필수다. 정 작가는 특유의 강렬하고 속도감 있는 문체로 이야기의 긴장감을 한 시도 늦추지 않는다. 

책을 펼쳐놓고 어디어디 문구가 좋았느니 어쨌느니 해야겠지만, 이 정도까지 쓴 것만으로도 내겐 벅차고 힘들었다. 아무튼 어느 땐가부터 소설책을 끊었던 내게 소설은 역시 재미난 거라는 사실을 일깨워준 참 기특한 소설이었다. 좋은 이야기꾼이 되는 건 정말 어렵다는 것도 새삼 느꼈다. 상상 속의 세령마을을 만들어낸 정유정 작가의 상상력력에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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